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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는 단순한 패션 영화가 아니었다. 전쟁 후 런던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한 평범한 여성의 자아 찾기 여정을 담고 있지만, 그 속엔 꽃, 거리, 패션, 그리고 사람의 내면을 관통하는 미장센이 섬세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영화는 아름답고 감각적인 화면으로 관객을 사로잡았고, 장면마다 등장하는 유럽의 골목과 꽃들은 주인공의 감정선과 교차하며 이야기의 깊이를 더해줬다. 특히 파리 꽃시장 장면과 패션쇼 속 백합, 후작의 자켓에 꽂힌 장미 등은 그 자체로 상징이자 영화적 언어였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미장센 요소 중 '꽃'을 중심으로 영화가 어떻게 감정과 상징을 시각적으로 풀어냈는지를 분석했다.
파리의 꽃시장, 감정의 확장 공간이 되었다
파리 꽃시장은 영화의 시각적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 장미, 다알리아, 자이언트 델피늄 등으로 가득한 이 공간은 해리스 부인이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이 장면에서 후작은 그녀를 꽃시장으로 데려가며 말한다.
“저는 이해합니다. 이런 장미꽃이나 드레스를 보면 만개했던 우리들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요.”
이에 해리스 부인은 씩 웃으며 대답한다.
“저, 아직 안 늙었어요!”
이 대사는 단순한 유머가 아니었다. 해리스 부인이 ‘나이 든 여성’이라는 사회적 시선을 넘어, 여전히 아름다움과 설렘을 느끼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본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녀의 변화는 꽃시장이라는 개방된 공간, 즉 파리의 한복판에서 촉발되었다. 유럽 특유의 따뜻하고 클래식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시장은 사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촬영되었고, CG로 노틀담 대성당 등 배경이 합성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꽃들은 이 장면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다. 삶의 다채로움, 나이 듦의 품위, 그리고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미장센이었다. 각각의 꽃이 내는 색과 향기는 해리스 부인의 감정을 자극했고, 이 장면을 통해 관객 또한 그녀의 감정 여정에 몰입할 수 있었다.
루이스 오디에 장미, 감정을 말하다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꽃은 단연 분홍 장미였다. 디올 하우스에서 후작의 자켓에 꽂혀 있던 장미를 보고 해리스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루이스 오디에 장미네요. 예쁘고 향도 좋고.”
루이스 오디에는 1851년에 소개된 고전 장미 품종으로, 다마스크 장미를 기반으로 한 만큼 향기롭고 풍성한 꽃잎을 자랑한다. 분홍빛이 부드럽고 고급스러우며, 오늘날에도 많은 가드너에게 사랑받는 품종이다. 1958년에 원작 소설이 출간된 것을 고려하면, 이 장미는 이미 100년 넘게 존재해온 꽃이었다. 영화의 시대 배경과도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진다.
분홍 장미의 꽃말은 ‘사랑의 맹세’, ‘행복한 사랑’이다. 이는 배우자와 사별한 후 상실의 시간을 겪은 두 인물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 영화 곳곳에 연분홍부터 진분홍까지 다양한 분홍 장미가 등장하고, 이들이 주는 정서는 붉은 장미가 주는 열정과는 또 다른 부드러움과 따뜻함이었다. 분홍 장미는 해리스 부인의 감정을 해방시키고, 삶에 다시 설렘을 불어넣는 상징으로 작용했다.
이 장미는 단순히 예쁘다는 감상을 넘어, 미장센으로서 강력한 메시지를 담아냈다. 해리스 부인의 변화는 장미처럼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시작되었고, 이는 관객에게 감정적으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백합, 인생의 경계에서 피어나다
또 다른 중요한 꽃은 영화 중반 디올 패션쇼 장면에서 등장하는 흰 백합이었다. 쇼장이 열리던 공간에는 벽면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백합이 자리했고,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닌 의미 있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흰 백합의 꽃말은 ‘순수’, ‘헌신’, ‘재탄생’이다. 이 시점은 디올 하우스가 귀족 중심의 고급 오트쿠튀르에서 벗어나, 대중을 향한 브랜드로 거듭나는 계기를 암시하는 순간이었다.
마치 결혼식 같기도, 장례식 같기도 한 이 분위기 속에서 백합은 브랜드의 ‘죽음과 재탄생’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해리스 부인 역시 이 패션쇼를 통해 자기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연다. 단지 드레스를 사기 위한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자존감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 장면에 앞서 영화 초반, 해리스 부인이 귀족 집안에서 청소를 하며 손질하던 꽃은 오렌지 백합이었다. 오렌지 백합의 꽃말은 ‘자신감’과 ‘에너지’다. 이는 당시 그녀에게 가장 절실했던 감정이자 태도였다. 현실에 지치고 위축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꽃을 통해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렌지 백합과 흰 백합은 같은 종류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고, 영화의 흐름 속에서 인물의 내적 성장을 꽃이라는 시각적 요소로 명확하게 보여줬다.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는 겉보기에 패션 영화였지만, 그 속에는 감정과 철학이 담긴 미장센이 숨겨져 있었다. 파리의 거리, 드레스, 그리고 무엇보다 꽃들은 인물의 감정을 비추는 거울이자 삶의 상징이었다. 분홍 장미는 따뜻한 설렘을, 백합은 변화와 재탄생을, 그리고 꽃시장은 희망과 자존감을 표현했다. 이처럼 영화는 꽃을 통해 감정을 말했고, 그 언어는 시각적 아름다움 속에 녹아 있어 더욱 진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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